[기고]도쿄에서 숙고한 관료통치 부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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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5-06-18 07:53본문
새로 쓴 책 <잘나가는 도시의 성공비결>을 탈고하고 지난달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교정과 출간을 앞두고 현장답사로 사실을 확인하고 추세에 부응하려 노력한 것이다. 최고를 지향하는 정부나 기업의 숨 가쁜 혁신처럼 특화도시 경쟁도 치열한 상태다.
도쿄는 뉴욕과 런던에 필적하는 세계도시다. 영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 막부를 설립하면서 도약했다. 1868년 에도 막부가 붕괴하자 중앙집권체제의 구심점으로 교토의 천황이 옮겨 왔다. 1945년 패전 직후에 도쿄 대공습을 치유하려고 인프라를 재건했다. 요즘은 뉴욕처럼 수려한 전망대 빌딩이 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심에서 ‘타이(태국) 페스티벌’이 개최될 정도로 다문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6·3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재연된 관료통치 부활극을 탐구하려고 도쿄 황거와 정부청사에서 시작해 메이지신궁과 야스쿠니신사를 찾았다. 제국주의 일본을 건설한 엘리트 관료의 무대인 야스쿠니신사에선 결기가 느껴졌다.
국가 주도 하향식 전략인 폐번치현(번의 폐지, 현의 설치)과 식산흥업은 메이지유신 직후의 행정개혁과 발전전략을 대표한다. 도쿄 위성도시인 가와사키와 요코하마는 산업과 무역에 특화한 곳이다. 도쿄와 지방을 연결하는 신칸센은 지역발전의 촉진제이자 수도권 집중화라는 양면성을 표출했다.
일본 근대화의 선봉장인 관료제는 조선과 대만에 관료통치를 이식했다. 식민통치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는 1885년 일본 초대 총리로 연임을 반복하다 1906년 조선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러일전쟁으로 확보한 다롄을 거점 삼아 만주를 넘보다 ‘동양평화의 수호자’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70년이 지나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통치 엘리트의 반목으로 무너졌다. 미국을 뒷배 삼아 종신 지배를 꿈꾸던 이승만 정부도 이보다 앞서 붕괴했다. 사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후반기는 프랑스 공화국 초기에 등장한 두 번의 제정을 연상시킨다. 검찰 관료 출신 윤석열의 불법계엄도 정적 제거와 장기집권을 의도했다는 점에서 민주공화국의 위기였다.
일본에서는 미군정의 통치 유전자 개조작업이 실패하자 ‘55년 체제’라는 정·경·관 엘리트 연합이 부활했다. 1990년대 중반 고도성장과 장기집권 체제에 균열이 시작됐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익의 반발이 폭주했다.
일본 권위주의와 미국 기술주의 행정 전통이 결합한 한국 관료제 신화도 여전하다. 경찰과 군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주력하다가 인권과 자유를 앞세운 검찰과 경제 엘리트가 급부상했다. 철옹성 법조와 쌍벽을 이루는 경제부처 관료는 국무총리나 은행장에 만족해왔지만 검찰의 추락을 틈타 최고 권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경제통인 대통령 권한대행들은 미국과의 통상 협상과 상법 개정안 재의요구를 앞세워 보수와 재벌의 호응을 유도했다.
일본 관료제가 건설한 만주국은 박정희 정부의 주역들이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곳이다. 한국판 관료제의 화신은 60년 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주도한 김종필이다. 근래에는 윤석열을 경유해 30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에 대응해 편제한 통상교섭본부장 출신 한덕수가 계보를 잇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 군부는 경찰에 밀렸지만 쿠데타로 주도권을 장악했다. 만주국이 확립한 행정 전통인 기획원을 경제 관료가 주도하면서 재정경제부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제 내외부 협업과 협치를 제대로 하려면 기술적인 대리인 행정에 익숙한 기획과 경제부처보다 헌신적 청지기 의식을 체득한 보건복지나 과학기술 및 문화체육관광 부처가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
도쿄는 뉴욕과 런던에 필적하는 세계도시다. 영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 막부를 설립하면서 도약했다. 1868년 에도 막부가 붕괴하자 중앙집권체제의 구심점으로 교토의 천황이 옮겨 왔다. 1945년 패전 직후에 도쿄 대공습을 치유하려고 인프라를 재건했다. 요즘은 뉴욕처럼 수려한 전망대 빌딩이 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심에서 ‘타이(태국) 페스티벌’이 개최될 정도로 다문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6·3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재연된 관료통치 부활극을 탐구하려고 도쿄 황거와 정부청사에서 시작해 메이지신궁과 야스쿠니신사를 찾았다. 제국주의 일본을 건설한 엘리트 관료의 무대인 야스쿠니신사에선 결기가 느껴졌다.
국가 주도 하향식 전략인 폐번치현(번의 폐지, 현의 설치)과 식산흥업은 메이지유신 직후의 행정개혁과 발전전략을 대표한다. 도쿄 위성도시인 가와사키와 요코하마는 산업과 무역에 특화한 곳이다. 도쿄와 지방을 연결하는 신칸센은 지역발전의 촉진제이자 수도권 집중화라는 양면성을 표출했다.
일본 근대화의 선봉장인 관료제는 조선과 대만에 관료통치를 이식했다. 식민통치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는 1885년 일본 초대 총리로 연임을 반복하다 1906년 조선통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러일전쟁으로 확보한 다롄을 거점 삼아 만주를 넘보다 ‘동양평화의 수호자’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70년이 지나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통치 엘리트의 반목으로 무너졌다. 미국을 뒷배 삼아 종신 지배를 꿈꾸던 이승만 정부도 이보다 앞서 붕괴했다. 사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 후반기는 프랑스 공화국 초기에 등장한 두 번의 제정을 연상시킨다. 검찰 관료 출신 윤석열의 불법계엄도 정적 제거와 장기집권을 의도했다는 점에서 민주공화국의 위기였다.
일본에서는 미군정의 통치 유전자 개조작업이 실패하자 ‘55년 체제’라는 정·경·관 엘리트 연합이 부활했다. 1990년대 중반 고도성장과 장기집권 체제에 균열이 시작됐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익의 반발이 폭주했다.
일본 권위주의와 미국 기술주의 행정 전통이 결합한 한국 관료제 신화도 여전하다. 경찰과 군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주력하다가 인권과 자유를 앞세운 검찰과 경제 엘리트가 급부상했다. 철옹성 법조와 쌍벽을 이루는 경제부처 관료는 국무총리나 은행장에 만족해왔지만 검찰의 추락을 틈타 최고 권력을 넘보기 시작했다. 경제통인 대통령 권한대행들은 미국과의 통상 협상과 상법 개정안 재의요구를 앞세워 보수와 재벌의 호응을 유도했다.
일본 관료제가 건설한 만주국은 박정희 정부의 주역들이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곳이다. 한국판 관료제의 화신은 60년 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주도한 김종필이다. 근래에는 윤석열을 경유해 30년 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에 대응해 편제한 통상교섭본부장 출신 한덕수가 계보를 잇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 군부는 경찰에 밀렸지만 쿠데타로 주도권을 장악했다. 만주국이 확립한 행정 전통인 기획원을 경제 관료가 주도하면서 재정경제부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제 내외부 협업과 협치를 제대로 하려면 기술적인 대리인 행정에 익숙한 기획과 경제부처보다 헌신적 청지기 의식을 체득한 보건복지나 과학기술 및 문화체육관광 부처가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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