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듣는 마음, 정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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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5-06-14 07:34본문
성경은 두 여인의 분쟁을 지혜롭게 해결한 이야기로 솔로몬 왕의 통치를 소개한다. 아기를 두고 서로 자신의 자식이라 주장하던 두 여인 앞에서, 왕은 신하에게 “아이를 둘로 나누어 주라”고 명령한다. 그 말에 한 여인은 울부짖으며 말한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차라리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 아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다른 여인은 왕의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살리려 한 여인이 진짜 어머니임을 간파하고, 아이를 그 여인에게 넘긴다.
이 판결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를 소개하기 위해 자주 인용된다. 솔로몬이 왕이 된 직후 하나님은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솔로몬은 자신이 어린아이 같고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며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의 히브리어 표현인 ‘레브 쇼메아’의 문자적 의미는 ‘듣는 심장’ 혹은 ‘듣는 마음’이다.
듣는 마음이란 단순히 타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사람의 내면을 식별하고 고통의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 숨겨진 진실을 알아차리는 통찰력을 뜻한다.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는 ‘듣는 심장’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여인이 창기였다는 점이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이들의 신분을 밝힌다. 그들의 말은 정치의 중심부에서 경청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가장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지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그 속에서 진실을 분별했다. 듣는 마음은 바로 이렇게 발화의 권리를 잃은 이들의 소리를 식별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정치는 이런 경청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인간이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말하기와 듣기의 공적 공간이 열릴 때,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 정치란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응답하는 능력이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에 대해 시민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년간 깊은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정파 간의 다툼, 혐오와 배제의 언어, 사회적 신뢰의 해체는 정치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때일수록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말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듣는 능력이다. 하지만 말은 넘치고 ‘듣는 마음’은 결핍된 시대다. 최근 정부가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을 지시하고, 유족에게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며, 트라우마 전문 상담소를 마련하고, 사회적 기억 공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이것이 일시적인 조치가 아니라 억눌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참사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유가족, 그리고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처럼 역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해 온 이들. 이들은 때로는 차별당하고, 때로는 외면당한 채, 자신을 지켜줄 언어를 갖지 못하고 침묵 속에 살아간다. 이들의 침묵을 마음으로 듣는 정치가 아니라면, 어떤 정치도 정의로울 수 없다.
정치인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행사해야 한다. 그 권한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듣는 마음을 잃는 순간 권력은 독선에 빠지게 마련이다. 솔로몬조차 말년에 이 마음을 잃었다. 부와 권력, 외교적 성공이 그의 감각을 무디게 했고, 생명 중심의 통치는 업적 중심의 통치로 변질됐다. 백성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됐다. 듣는 정치를 잃어버린 대가는 너무도 컸다.
말하기의 정치에서 듣기의 정치로, 권위의 정치에서 관계의 정치로, 기계적 평등의 정치에서 생명 중심의 정치로 나아가야 할 때다. 말할 권리를 잃은 이들의 감춰진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정치의 계절이 열리기를 바란다. 듣는 마음이야말로 정치의 시작이며, 분열된 사회를 꿰매는 질긴 실이다.
이 판결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를 소개하기 위해 자주 인용된다. 솔로몬이 왕이 된 직후 하나님은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솔로몬은 자신이 어린아이 같고 백성을 다스릴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며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의 히브리어 표현인 ‘레브 쇼메아’의 문자적 의미는 ‘듣는 심장’ 혹은 ‘듣는 마음’이다.
듣는 마음이란 단순히 타인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사람의 내면을 식별하고 고통의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 숨겨진 진실을 알아차리는 통찰력을 뜻한다.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는 ‘듣는 심장’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여인이 창기였다는 점이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이들의 신분을 밝힌다. 그들의 말은 정치의 중심부에서 경청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가장 보잘것없고 하찮게 여겨지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그 속에서 진실을 분별했다. 듣는 마음은 바로 이렇게 발화의 권리를 잃은 이들의 소리를 식별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정치는 이런 경청의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인간이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말하기와 듣기의 공적 공간이 열릴 때, 진정한 정치가 시작된다. 정치란 권력을 행사하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응답하는 능력이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에 대해 시민들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년간 깊은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정파 간의 다툼, 혐오와 배제의 언어, 사회적 신뢰의 해체는 정치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때일수록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말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듣는 능력이다. 하지만 말은 넘치고 ‘듣는 마음’은 결핍된 시대다. 최근 정부가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을 지시하고, 유족에게 생활지원금을 지급하며, 트라우마 전문 상담소를 마련하고, 사회적 기억 공간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이것이 일시적인 조치가 아니라 억눌린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참사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이주노동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유가족, 그리고 위안부·강제징용 피해자처럼 역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해 온 이들. 이들은 때로는 차별당하고, 때로는 외면당한 채, 자신을 지켜줄 언어를 갖지 못하고 침묵 속에 살아간다. 이들의 침묵을 마음으로 듣는 정치가 아니라면, 어떤 정치도 정의로울 수 없다.
정치인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행사해야 한다. 그 권한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듣는 마음을 잃는 순간 권력은 독선에 빠지게 마련이다. 솔로몬조차 말년에 이 마음을 잃었다. 부와 권력, 외교적 성공이 그의 감각을 무디게 했고, 생명 중심의 통치는 업적 중심의 통치로 변질됐다. 백성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분열됐다. 듣는 정치를 잃어버린 대가는 너무도 컸다.
말하기의 정치에서 듣기의 정치로, 권위의 정치에서 관계의 정치로, 기계적 평등의 정치에서 생명 중심의 정치로 나아가야 할 때다. 말할 권리를 잃은 이들의 감춰진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정치의 계절이 열리기를 바란다. 듣는 마음이야말로 정치의 시작이며, 분열된 사회를 꿰매는 질긴 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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